[박문수 학장 칼럼] 사랑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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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학장 칼럼] 사랑과 용서
  • 이도균 기자
  • 승인 2020.03.13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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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容恕, Forgiveness)란, 가해자에 대해 쌓여가는 ‘복수(復讐)’와 같은 피해자의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마음과 태도를 피해자가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스스로 변화시켜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백과사전은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박문수 학장
박문수 한국폴리텍대학 진주캠퍼스 학장

좀 더 구체적으로 ‘용서’는 가해자에 대한 피해배상이나 피해보상과 같은 피해자의 모든 채권(債權)적인 요구를 피해자 스스로가 포기하고 자신을 가해한 그 죄에 대해 ‘무죄’임을 피해자가 ‘직접 선언’하는 법적인 용어와도 같다.

종교나 사회과학 및 의학에서도, 덕(德)의 관점이나 심리학의 개념에서 살펴본 용서의 이점(利點)들을 탐구했었는데, 그 결과 용서의 이점은 용서받아야 할 사람보다는 오히려 용서하는 사람을 위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처럼 용서는 용서받아야 할 가해자의 책임과는 상관없이 고통당한 피해자를 위해서 행해지는 ‘자위(自慰)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받은 손해에 대한 ‘원상회복’을 그 가해자에게 요구하지 않는 매우 덕 있는 행위이다.

즉, 가해자가 저지른 손해에 대한 ‘회복(回復)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피해자가 조금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물론 그런 갈등 가운데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때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것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자기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이 손해 본 것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보복’이나 ‘앙갚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람직한 방법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피해자 본인의 마음이 더 괴롭고 이로 인해 더 큰 손해를 피해자 자신이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들로부터 손해를 보았을 때 피해자가 이를 처리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로 ‘용서’하는 것이다.

이런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피해자 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다. 남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먹는 그 자체가 매우 불행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처지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남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런 역지사지 하는 자세는 남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서 상대방의 공감을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서적으로도 상대방의 기쁨이나 슬픔 및 분노나 아픔 등과 같은 감정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잘못을 더 쉽게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런 선한 마음을 지니게 해 준다.

용서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에게 손해를 당한 ‘나 자신을 위해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를 가해한 ‘그 사람을 위해서’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때 나 자신을 위한 용서는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 용서는 가해자가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그런 전제하에 ‘조건적’으로 용서해 주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48년 10월, 해방 후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여순반란사건 때 일어난 한 사건이다. 당시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이 반란군에게 총살당해 순교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었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이 체포돼 사형당하게 될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손영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아들로 삼겠다는 말을 하면서 그를 구타하지도 말고 ‘용서’해 달라며,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했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그를 살려서 자기 아들로 입적시켜 가족으로 함께 살았었다.

이런 ‘용서’는 평범한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도 따라 행할 수도 없는 엄청난 용서였지만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실천으로 그를 ‘용서’ 했었다. 사람들은 이런 손양원 목사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른다.

이런 ‘무조건’적인 용서는 결국에는 손양원 목사 자신을 위한 용서가 되기도 했다. 만약 그렇지 안았다면, 손양원 목사 역시 미움과 원망에 사로잡힌 채, 고통스러운 한평생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처럼 ‘무조건’적인 용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용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이 예수께 용서받은 사건도 역시 잘 알고 있다.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돼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인을 죽이려던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록 그 여인을 이미 용서한 이후였지만 간음한 여인에게 앞으로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한 ‘조건’을 얘기하셨다. 어찌 보면 그 여인에 대한 ‘조건적인 용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죄를 지은 그 여인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조건적인 용서가 바로 ‘남을 위한 용서’인 까닭이다.

‘나를 위한 용서’나 ‘남을 위한 용서’나 모든 용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 목적은 바로 ‘사랑’이다.

왜냐하면 ‘용서’란 사랑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도 먼저 원수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용서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용서란 작게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포함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행위이며, 좀 더 크게는 내가 포함된 모든 공동체의 사회적인 ‘갈등을 해결’ 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가 반드시 ‘용서를 실천’ 해야만 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서로 용서하면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

                                                                                                      한국폴리텍대학 진주캠퍼스 박문수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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